건축뉴스
[서양근대건축사]라 치타 누오바 (1914)안토니오 산텔리아가 꿈꾼 미래파 신도시
2014-10-20 09:27:51 | 아키포털
안토니오 산텔리아가 꿈꾼 미래파 신도시
“우리는 우리의 현대 도시를 발명하고 다시 새롭게 건설해야 한다. 그것은 거대하고 떠들썩한 조선소와 같은데, 능동적이고 유동적이며, 모든 곳이 다이내믹하다. 그리고 현대 건축물은 커다란 기계와 같다.” (안토니오 산텔리아, 「메시지」, 1914.5)유럽의 근대주의 건축운동을 돌이켜 보건데, 1914년은 무척 중요한 시점으로 간주된다.
안토니오 산텔리아, <라 치타 누오바>, 1914: 다층의 도시구조와 결합된 고층건물 부분 상세도
그 까닭의 근본 배경에는 일차세계대전의 발발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이 있었다. 청년 샤를 에듀아르 쟌네레(후일의 르 코르뷔제)는 전쟁 후의 신속한 복구사업을 위해 도미노 시스템(1914~15)을 창안했고,역사가 니콜라우스 펩스너는 그때까지 전개되던 건축운동을 일단락 짓기위해 그 흐름의 완성을 발터 그로피우스의 작품, 특히 독일공작연맹 전시관(1914)에서 찾았다. 그러나 그 해에는 근대건축운동 가운데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중요한 발자국이 있었으니, 이탈리아의 젊은이 안토니오 산텔리아(Antonio Sant'Elia, 1888~1916)가 ‘신경향(Nuove Tendenze)’ 그룹전에 출품한 일련의 미래주의 신도시 스케치 <라 치타 누오바(La Citta Nuova)>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전시회 카탈로그에는 그 스케치의 소개말 격인「메시지(Messaggio)」(1914.5)라는 글도 출판된다.
안토니오 산텔리아, <라 치타 누오바>, 1914: 중앙역 조감도 - 1912년도의 <비행장> 계획안에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산텔리아의 스케치와 글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한창이던 미래주의 예술운동의 한 부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 ‘미래주의(Le Futurisme)’는 시인이었던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 1876~1944)에게서 시작되어, 미술과 조각을 포함한 다양한 장르로 확산됐고, 결국 건축에까지 이른 것이다. 프랑스신문 『르 피가로(Le Figaro)』에 출판한 「미래주의선언(Manifeste du Futurisme)」(1909)에서 마리네티는 과거의 전통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현대 메트로폴리스의 집산적 역동성과 그 힘의 분출을 예찬한다. 그리고 무정부주의적 어조로 혁명적 변화와 속도에 대한 갈망을 표현했다. 그가 자동차와 비행기 등 당대의 과학기술이 낳은 최신의 기계에 매료된점은 곧 등장할 코르뷔제를 예견하기도 한다.

안토니오 산텔리아, <비행장(Stazione Aeroplani)>,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 「미래주의선언」, 『르 피가로』,1909.2.20. 1912: 밀라노 중앙역 재건을 위한 계획안
잇따른 미래파 화가나 조각가의 선언문 역시 새로운 사회를 향한 변혁의 입장을 취하게 되는데, 움베르토 보쵸니(Umberto Boccioni,1882~1916)의 작품과 글에서 볼 수 있듯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나 입체파에 영향을 받은 콜라주 기법이 도입된 점도 특징적이다.
다시 산텔리아의 <라 치타 누오바>로 돌아가 보자. 우선 이 도면들에는 구체적인 콘텍스트나 전체를 아우르는 평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여기에서 우리는 다층의 도시조직을 인식할 수 있고 발전소, 비행장, 비행기 격납고, 정거장, 셋백(set-back)된 고층건물 등을 볼 수 있다. 수직과 수평의 동선을 담당하는 엘리베이터 타워와 브리지, 콘크리트 블록과 철제 트러스의 대비, 그리고 이 같은 구성에 힘과 속도를 부여하는 도면상의 날카로운 직선의 반복 역시 전통에서 탈피한 새로운 도시를 인상 지운다. 그리고 자연의 요소를 완전히 소거함으로써 철저한 기계주의의 사회를 상정했다. 하지만 산텔리아의 스케치에는(비교적 최근이긴 하나) 과거로부터의 몇몇 참조점도 찾을 수 있는데, 건물의 커다란 매스는 비엔나 제체션,특히 ‘바그너파(Wagnerschule)’ 디자인을 단순화시킨 형태로 볼 수 있고, 19세기의 창고나 다리 구조물과도 연관되며, 다층의 도시구조와 거대 메커니즘의 경우는 당시 고밀도시로 성장 중이던 뉴욕의 상황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점보다 우리가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산텔리아의 글 「메시지」와 그림 <라 치타 누오바>가 상호간에 꽤 모순적이라는 사실이다. 글은 가벼움과 투명성을 강조하지만, 그림은 거대한 매스와 기념비적 구조물이 두드러진다. 글은 메트로폴리스의 역동성과 군중의 힘을 발산하지만, 그림은 훨씬 정적일 뿐만 아니라 군중이 아예 화폭에서 배제되어 있다. (오히려 이 도시는 현장으로부터 초연한 관찰자에 의해 조망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불일치는 산텔리아가 어느 시점에 미래주의 예술가들과 관계 맺었는지에 대한 논란을 낳았으며, 자신의 건축(드로잉) 경향을 상당 부분 확립한 상태에서 미래주의에 접속했음을 암시한다. 「메시지」에 ‘Futurist’라는 단어가 단 한 차례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약 2개월 후 마리네티의 도움으로 수정 보강된 「미래 주의건축선언(L’ARCHITETTURA FUTURISTA: Manifesto)」(1914.7)에는 이 말이 여러 곳에 삽입되었고 지속적인 변화와 역동성 및 자유에 대한 미래주의적 이상이 더욱 강력히 개진되었다.
움베르토 보쵸니, <병+테이블+주택(Bottiglia+|Tavola+Caseggiata)>,
1912: 미래파 예술가 보쵸니는 분절된 형태의 상호관입과 투명성을 통해 새로운 공간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늦어도 1914년 여름 이전에 산텔리아가 미래주의 예술가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는 사실이며, 이를 통해 ‘건축의 미래’를 앞당기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현실세계에서 구현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다른 미래파 동료들과 함께 친파시스트적 성향을 보였던 그는 1915년 조국 이탈리아를 위해 참전했고, 이듬해 스물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전사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실제의 프로젝트가 주어졌다면 과연 어떠한 작품이 가능했을까? 자못 궁금하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꿈’은 온전한 성취로서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저변의 사회적 인식구조에 작은 균열을 줌으로써 더 큰 가치를 획득하는법. 그의 미래주의 건축과 도시는 현실세계의 여전한 보수성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진행중이던 근대건축운동에도 비옥한 자양분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그의 아이디어는 당대의 토니 가르니에와 르 코르뷔제의 도시계획안, 그리고 1960년을 전후한 메타볼리스트와 아키그램의 공상과학적 도시계획안과도 비교해봄직하다.
출처
[서양근대건축사]라 치타 누오바 (1914)안토니오 산텔리아가 꿈꾼 미래파 신도시, 건축문화신문, 2012년 12월 3일, 제7면
댓글 0개
많이 본 건축뉴스
- 1 한국토지주택공사(LH), 도심 공실 상가·오피스를 ...
- 2 국토교통부, 중앙·지방 건축정책 공감 협의회 첫 ...
- 3 한국토지주택공사(LH), 민간참여 공공주택사업 금...
- 4 국토교통부, 반도체공장 설비배관실 층간 방화구획...
- 5 국토교통부, 분양가상한제 기본형건축비 0.77% 인...
- 6 국토교통부, 서울 도심복합사업 공모에 44곳·6만 ...
- 7 국토부, AI 활용 건설현장 위험 감지 기술 실용화 ...
- 8 2024 스마트건설 챌린지 개최
- 9 LH, 3기 신도시 최초 본청약 공급 시작
- 10 1기 신도시 재건축 선도지구 2.6만호 규모로 11월 ...







